축구선수 손흥민한테는 손흥민존이 있다.
그 존은 손흥민이 아버지 손웅정과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낸 존이다.
손흥민 존은 바로 여기다. 페널티 박스 양쪽 코너 지역.
손흥민존은 어떤 영역일까
수비수 입장에서 굉장히 애매한 위치다. 골대와 가깝지 않으니 슛을 하라고 놔둬도 실점 가능성이 낮은 지역이다. 달려가서 막을 경우 상대 공격수가 자신을 제칠 경우 바로 실점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지는 지역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압박 수비를 하기에는 애매하다. 따라서 수비수와 공격수 사이에는 공간이 생긴다. 다른 지역보다는 공간이 꽤 생기니 공격수 입장에서는 자신의 리듬대로 슛을 하기 좋다. 하지만 골대까지 멀어 득점 가능성이 굉장히 낮다. 골키퍼 입장에서는 애매한 구역일 수 있다. 공격수가 슛을 하지만 골대 안까지 정확히 잘 안 들어오거나 와도 공이 약하다. 또 거리가 꽤 있고 상황이 바뀔 수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수비하기도 어렵다.
아버지가 준 선물
흥민이가 열어덜 살 때부터 나와 함께 주력으로 한 훈련은 슈팅 훈련이었다. 어릴 때는 잦은 슈팅 연습이 근육과 관절 조직에 무리를 줄 수 있어 근력과 기술 훈련에 집중했지만, 어느 정도 하드한 훈련도 감당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선 이후 슈팅 훈련에 매진했다. 매일 왼발 500개, 오른발 500개, 그렇게 양발로 슈팅 1,000개씩이 기본이었다. 훈련도 때가 있고 집중해 완성해야 할 시기가 있다.
(중략)
공격 라인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내 경험과 은퇴 후 축구 경기들을 분석한 것들을 기반으로 했다. 어떤 상황에서 슈팅의 기회가 찾아오고, 어떤 상황에서 실수들을 많이 하는지 수없이 생각하고 상상했다. 200개 넘게 녹화해놓은 주요 대회 경기 테이브들을 돌려보며 실수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순간 실수하는 장면들을 더 집중해서 보았다. '그 좋은 찬스에서 슈팅에 실패하다니⋯⋯.'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장면을 뽑아서 흥민이 슈팅 훈련에 접목했다.
위치는 다섯 존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손흥민존'은 그중 두 군데를 칭한다. 다섯 포인트를 정하고 그곳에서 골을 감아 때리는 훈련을 했다. 멈춰 있는 공이 아닌 내가 반대쪽에서 강하게 차주는 방식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흥민이가 볼을 잡고 드리블을 하다 슈팅을 하는 경우보다 패스로 받아서 때리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볼이 힘들게 들어온 상태에서 그 볼을 받아 때리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중요했다. 패스로 들어온 공을 처리하는 퍼스트터치부터 슈팅까지. 그래서 항상 여러 각도에서 볼을 강하게 차주었고 흥민이가 잡아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컨트롤한 후 때리기. 그것의 무한반복이었다.
"힘 빼고!"
"끊어!"
흥민이가 슛을 할 때마다 외쳤다.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정확한 슈팅이 필요했다. 나는 무작정 가운데에서 강하게 때리는 슈팅은 지양한다. 골키퍼가 가제트팔이 아닌 다음에야 절대로 잡을 수 없는 위치로 때리는 것이 중요했다. (중략) 하지만 골키퍼가 공의 위치를 파악할지언정 그 순간에 몸을 던지고 손을 뻗어 닿을 수 없는 지점이라면 아무리 약한 공이라도 들어간다. 그 불가항력의 위치를 파고드는 것이 중요했다. 패널티 지역 및 외곽의 중앙과 좌우, 이렇게 다섯 포인트 지점에서 각도를 정하고 감아 때리는 훈련을 진행했다.
출처: 손웅정,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전자책판), 2021, 6 감사와 겸손 - 여름날의 지옥훈련 중에서
손흥민 아버지 손웅정씨는 '골키퍼가 공의 위치를 파악할지언정 그 순간에 몸을 던지고 손을 뻗어 닿을 수 없는 지점, 불가항력의 위치를 지정'해서 훈련시켰다. 그 다섯 포인트 중 두 곳이 바로 손흥민존이다. 그 덕분에 손흥민은 다른 선수들 도움 없이 온전히 혼자서 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인 손흥민존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손흥민존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까?
온전히 혼자 힘으로 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축구는 팀스포츠이다. 혼자 아무리 잘 해도 패스를 안 해주면? 골을 넣을 수 없다. 축구의 신 메시조차 팀을 옮긴 뒤 골이 급격히 줄어 들지 않았는가. 유럽 무대에 아시아 축구 선수가 신입으로 들어 왔다고 생각해보자. 기존 유럽축구 선수들은 신입 아시아 선수를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아시아 축구 선수의 실력 자체를 의심할 것이고, 따라서 패스를 안 해준다(실제 해외진출 실패했던 선수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패스를 못 받았다는 얘기를 자주 볼 수 있다). 당연히 유럽 선수들은 이렇게 말할 거다. 아 인종차별이 아니라, 그 친구 실력이 부족하니 패스를 안 한 거라고.
실력을 인정 받아야만 패스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신뢰 받지 못하는 축구 선수가 어떻게 패스를 받을 수 있을까. 패스를 못 받으니 -> 골을 못 넣고 -> 역시 저 친구는 실력이 없는 아시아 선수군 -> 다시 패스를 못 받게 된다. 그렇게 악순환 고리에 빠지고 -> 역시 못하네. 이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거기다가 유럽 현지 언어도 못하니 말도 잘 못 알아들으니 점차 소외되고 팀에 못 어울리니 시간이 지나도 신뢰를 쌓지 못하고 여전히 패스를 못 받는다. 그러다가 결국 퇴출된다. 손웅정씨는 이런 상황을 내다보고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
개발자와 손흥민존
개발은 기본적으로 팀스포츠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개발할 수 없다. 서로 나눠서 각자 맡은 것을 개발하게 된다. 새롭게 이직할 경우 새로온 개발자한테 친절히 설명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경계하고 정보를 안 알려주는 경우도 꽤 있다. 축구 선수로 치면 패스를 안 해주는 거다. 패스를 안 해주니 결과를 낼 수 없고, 팀내에 안 좋은 평가가 쌓이게 된다.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다른 곳으로 이직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손흥민처럼 손흥민존이 있다면 팀내 평가를 한방에 긍정적으로 뒤집고 회사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
나에게는 OOO존이 있을까?
손흥민존을 달리 말하면 나 혼자서 성과를 낼 수 있으며, 다른 개발자들과 차별화되는 어떤 장점, 굉장히 높은 생산성을 발휘하는 분야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게 OOO존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특별히 떠오르는 게 많지 않다. 백엔드개발자로서 대규모 데이터 처리, MAU가 높은 서비스 운영 경험, 데이터베이스 튜닝 최적화, Spring, NestJS, Django 등 특정 프레임워크에 대한 아주 깊은 이해 등 손흥민존처럼 필살기가 될만한 그 무엇이 아직 없다. 나만의 OOO존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루 1000회 공을 찼던 손흥민처럼 훈련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