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고 생각 Pause and think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

Tap to restart 2024. 2. 18. 22:00
반응형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

김연수 소설가의 책 '우리가 보낸 순간'의 책 끝 부분에 '날마다 글을 쓴다는 것'이란 글에 나온 표현이다. 남들이 봤을 때 김연수 소설가는 스물 셋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스물 넷에 장편 소설로 문학상을 받은 천재 작가다. '날마다 글을 쓴다는 것' 글을 보면 천재 작가인 김연수 소설가도 소설 쓰기를 그만둘까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재능이 없다는 의미'

몇 번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난 뒤에 나는 자신에게 생긴 부정적인 일들을 '재능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십대 시절의 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소설창작 시간에 관례대로 합평이라는 걸 한 적이 있었다. 칭찬을 오천 번 정도는 받아도 원래의 밝고 창의적인 아이 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이십대 초반의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서는 서로 다른 학생이 쓴 소설이 얼마나 후진지에 대해서 앞다퉈 얘기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말들을 듣는 학생들마저도 자신이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학생들은 아마도 글 쓰는 게 너무나 좋아서 문예창작과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사 년 동안 그들이 듣는 이야기는 글을 얼마나 못 쓰는지에 대한 비판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고 원래 입학할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다섯 배의 긍정적인 영향이 필요하다. 친구나 교수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이 쓰는 글이 너무나 좋다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 결과, 졸업할 무렵이 되면 그들이 쓰는 글은 정말 형편없어진다. 이런 흐름에 대한 그들 나름의 변명이 바로 '내겐 재능이 없다'는 말이다.
일단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면 더 이상 글을 쓰는 일이 지속되기 힘들다. 더구나 그게 소설이나 시라면 더욱 어렵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작가나 시인도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듯이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 책의 어딘가에 썼지만, 소설 쓰는 일을 그만둘까 하고 혼자 고민하던 이십대 후반에 내게 크게 위안이 됐던 건 '소설 쓴 지 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힘들다'던 박완서 선생의 말씀이었다. 거기 차이가 있다면 힘들다 하더라도 결국 쓰는 사람이 있고, 못 쓰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쓰지 못한다.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 그 비밀은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을 때 자기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출처: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p. 214-215.

 

마지막 두 문장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 아닐까.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쓰지 못한다.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 그 비밀은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을 때 자기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두 문장 말이다.

김연수 소설가가 다시 소설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직장생활 뒤였다.

 

김연수 소설가가 다시 소설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

내가 다시 소설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삼 년 정도 직장생활을 한 뒤였다. 그 삼 년 동안 여러 잡지사를 다녔는데, 일이 일이다 보니까 썼다가 지웠다가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매주 최소한 100매씩은 써야만 했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게 좋은 점은 거기에는 무슨 재능 같은 게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체력만 있으면, 그게 없다면 끈기라도 있으면 됐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마감은 하고 죽어야만 했으니까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앉아서는 내게 글 쓰는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따져볼 겨를은 없었다. 잡지사에 다니면서 나는 매일 다양한 종류의 원고를 썼다. 내 이름을 걸고 쓴 원고도 있었고, 익명이나 가명으로 쓴 원고도 있었다.
선배 기자들 중에서는 소설 쓸 때의 나처럼 정말 쓰기 싫다고. 나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소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고통 없이 글을 썼다. 주제와 형식이 제시되면 바로 썼다. 어차피 소설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써서 편집장에게 보여주면 편집장이 문장을 손봤다. 처음에는 내가 얼마나 글을 못 쓰는지 지적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손본 문장을 보는 일이 괴로웠지만 편집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자 놀랍게도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쓰고 지적받고 다시 썼다. 또 쓰고 지적받고 다시 쓰고, 몇 달이 지나자 문장과 구성은 편집이라는 기준에 따라 조금씩 좋아졌다. 그건 내가 최초로 경험한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였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칭찬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 들게 된다. 여전히 무언가 쓰기 위해서 책상에 앉으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어떤 글을 쓸 것인지 기대된다. 잘 쓸 수도 있고 못 쓸 수도 있지만, 어쨌든 글을 쓸 수는 있다. 잘 썼다면 다들 잘 썼다고 말할 것이고, 못 썼다면 편집장이 빨간 펜으로 여기저기 지적해서 돌려줄 것이다. 그때는 다시 쓰면 된다. 다시 쓰면 좀 더 좋아진다. 어제보다 오늘 좀 더 잘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모든 일이 이처럼 명료해진다.
하지만 명료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을 쓰려고 할 때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뭔가 잔인한 고통의 말들을 스스로 내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자신에게 그 말들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삶은 구원에 가까울 정도로 달라진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믿어버리자.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잔인한 고통의 말들을 은연중 퍼붓는다면.
출처: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p. 217-218.

 

김연수 소설가는 잡지사에서 다닐 때 재능을 따질 겨를이 없었고,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써내야 했다. 처음에는 지적받았을 때 괴로웠지만,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니 고통이 사라졌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다보니 어느덧 어제보다 오늘 좀 더 잘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좀 더 잘하는 세계' 속에서 소설을 썼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김연수 소설가가 되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를 만들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우리는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그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짧은 시간 안에 결과물이 나오는 환경을 만들기

김연수 소설가가 경험한 잡지사 같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는지 빠르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의 큰 요인 중 하나는 마감이 아니었을까. 잡지 기사를 1년에 걸쳐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간지라면 일주일 안에 어떻게든 썼을 것이고, 월간지라면 한 달 안에 쓰고 끝냈을 것이다. 잘 쓴 글도 있고, 잘 못 쓴 글도 있겠지만, 다음 글에서 새롭게 도전할 수 있었다.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기

김연수 소설가는 편집장의 지적을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고쳤다.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니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 기사에 대한 평가를 자신에 대한 평가로 생각하면 '재능이 없다'란 생각으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평가나 비판을 그저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면, '재능이 없다'란 생각에 빠지지 않게 된다.

 

개발과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

개발 일은 대체로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로 만들기 좋은 환경인 거 같다. 스타트업은 대부분 애자일 방식으로 개발한다. 스프린트는 2~4주 정도 진행하며, 잡지사처럼 마감이 있기 때문에 잘 했든 못 했든 그 안에 끝이 난다. 코드 리뷰를 받을 때 느낌도 비슷하다. 기술을 배우는 느낌이다. 지적받으면 다시 고치면 된다. 물론 김연수 소설가가 예로 든 소설창작 시간 합평처럼, 얼마나 코드가 후진지에 대해서 폭력적으로 얘기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 회사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회사라면 얼른 나와야겠지만.

 

어쩌면 나처럼 전공은 아니지만 개발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개발일을 좋아하는 것도 개발이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세계'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재능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 좀 더 잘 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말이다.

 

반응형